다가오는 11월30일(음력 10월28일)은 22년전인 1991년 9월16일(음력8월9일) 갑작스런 교통사고
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이 이 세상에 오신지 90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에 나는 성남에서 조그마한 전자회사를 창업해 고전하던 시절이었고 80년대 초반 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이 창업한 구산상사(주)와 구산토건(주)이 안정적인 괘도에 진입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
으며 첫째와 둘째 형님은 현대자동차 중역과 외환은행 반포지점장으로 각각 근무하셨고, 그리고 지
금 아주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동생은 당시 미시간대학 박사과정에 있었다.
이제 막 사업이 본 괘도에 접어들기 시작해 어머님께 크게 효도를 하겠다고 마음 먹고있던 셋째와
넷째 형님은 어머님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비통해하며 그 슬픔이 극에 달해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어머님이 평소 자식들이 준 용돈을 조금씩 모아 제천지역 소년소녀가장들에게 매월
장학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어머님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어머님께 다하지못한 효도
를 하는것이라는 데에 뜻이 모아져 셋째와 넷째 형님의 주도하에 어머님의 이름을 딴 우원사모장학
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구산토건(주)을 경영하는 형님이 22년째 이 지역 7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매
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아버님이 돌아가신후엔 장학회의 이름을 아버님의 호와 어머님의 이
름에서 빌려와 백촌우원장학회라고 바꾸기에 이르렀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당시 실감하며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으며 마음을 추스렸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철학에 심취해 고등학교시절 가출을 하기도 했던 셋째형이 이 장학회 발족취지
문을 직접 쓰고 낭독하여 장학증서 수여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또한 어
머니 49제 전날은 어머님이 소중히 간직하시던 나무십자가를 등뒤에 걸고 맨발에 커다란 나무지팡
이를 들고 아침 일찍 사시던 압구정동 아파트를 떠나 어머님이 잠드신 여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천호동 끝자락인 하남 입구에서 늦은 오후 피맺힌 맨발로 열심히 걸어가는 형님
을 하루종일 헤맨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검은 양복으로 밤새도록 걷다가는 형님도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저의 간곡한 설득으로
가까스로 내 차로 산소까지 모시고 가 그 십자가를 어머님곁에 둘 수 있었다.
이 형님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만 메고 다녔고 주변에 연을 맺은 어려운 사
람들과 단체와 자신의 모교에 거액의 기부를 하며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한 것을 어머님이 평소에 마
음 아파하시던 사회적 약자들에게 베풀면서 그 허탈한 마음을 달래었던 것 같다.
우원사모장학회 발족 취지문
언젠가는 머언 길을 떠나가야하는 나그네처럼 왔던 길을 회귀하는 인간의 숙명이 어머니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이 해 지루한 비와 유달리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소슬한 가을 바람이 옷깃을 여미
게하는 1991년 9월 16일 시계가 정오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즈음 어머니는 곧 다가올 한가위에
일곱 자식이 옹기종기 모일 즐거움, 그 행복한 꿈과 희망을 이 대지에 묻고 한이 골 깊히 서린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에서 부유한 지주의 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일생을 박봉으로 살아야 했던 청빈한 교직자인 아버지를 일생의 반려자로 하셨습니
다.
어머니는 일곱 형제를 낳으셨으며, 혹한의 겨울과 이른 봄에 자식을 모두 낳으신지라 산후조리
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뼛골을 스미는 바람을 등으로 한 채 얼음을 깨가며 찬물에 기져귀를 빨아
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일곱 자식을 모두 최고 학부까지 교육시키기 위해 당신의 몸을 희생의 제단에 봉헌하
셨으며 당신의 아름다운 청춘은 물론이요 개인적 삶을 망각의 여울로 떠내려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인생 황혼의 길목에서 떠나고 싶지않은 이 곳 교향땅을 떠나야 하셨으며 낯선 이방지
대 서울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식과 아버님에 대한 희생도 모자라셨는지 거리 곳곳에서 만난 노약자, 뷸우한 어린
이, 거지, 봉사, 불구자등에게 그들의 하루 배고픔을 면하게 하시려고 동분서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보랏빛 나래를 폈던 어린시절과, 가슴설레며 내일을 기약했던 청춘을 지나 인생 황혼
의 여울목까지 지켰던 고향땅을 자식을 앞세워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삶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청풍국민학교가 수몰되기 직전 서울에서의 정신적 방황에 지쳐 이 곳 고향 청풍으로 돌아와 자
식과 청풍국민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배나무 앞에 섰습니다. 한 아름 안아보시고 50여년전
국민학교 다닐 때 안아 본 배나무도 한 아름이요, 지금 긴 팔에 안아 본 배나무도 한아름이라, 그
감회에 젖어 지긋이 눈 감으시고 저희에게 "인생은 그저 나무 그늘에서 한 모금 찬 물 마시고 가
는 나그네와 같다." 하시며 스케쥴도 없는 정거장에 잠깐 머물다 가는 삶의 허무함을 통해 인생
의 진리에 접근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도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학교에서 고적
한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시던 그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듯 합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일생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셨던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삶의 위대
한 흔적을 이 지상에 남기시고 당신의 생을 마감해 가셨습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사람
을 우리 일곱 형제를 통해 용서함으로써 당신이 일생 봉헌했던 사랑의 빛을 이 땅에 남기셨습니
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 목숨보다 강렬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당신의 연민보다 더 처절했으
며 가난한 사람과 불구자에 대한 사랑은 당신의 슬픔보다도 더 진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일생과 같이했던 불굴의 자생력을 일곱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어머님이 아직 코흘리는 어렸을 적에 당신의 아버님이 "저 애는 사지의 땅에 꽂아놓아도 살 아
이라" 고 예견했던바, 당시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그 운명적 예언은 현실이 되어, 가난
과 청빈이 재산이던 교직자를 당신의 반려자로 삼아 그 길고 지루했던 가난의 긴 터널을 지나왔
으며, 그로 인해 당신의 건강은 그의지로 지탱하시기엔 역부족이었고, 정신력도 그 남은 빛을 발
하기에는 이미 희미해졌으며, 이를 극복하고 천수를 다하기에는 우리 일곱 형제의 효가 부족하
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서울서 당신의 동생에게 의탁해 국민학교 다니던 첫 아들이 겨울방학에 귀향하면 낡고 헐한 옷
을 빨아 아늑한 전등불 아래서 깁고 기워 고이 접어 그 기나긴 겨울밤을 지새우는 포근한 어머님
의 모습을,
하루 종일 장을 담가 낮으막한 큰 독에 넣었는데 저녁무렵 기저귀 빨래하고 돌아와 보니 돌판을
디디고 서서 하루 종일 담근 간장을 다 퍼낸 둘째 아들을 보고 철이 없는 네가 무슨 죄가 있겠느
냐하시며 꼭 안아주시던 그 자애로운 모습을,
가난으로 당신의 저고리를 천겹만겹 기워 입으신지라 포목점에 가서 저고리 한 감 떠 오시고 마
루에 앉아있는 깁고 기운 옷입은 셋째아들 보시고 "내가 미쳤지" 하시며 다시 포목점으로가 새로
산 옷감 물리시고 돌아와 세째아들 부둥켜안고 우시던 그절망과 연민에 찬 어머님의 모습을,
수산의 명소는 옥순봉이라 네째아들 국민학교 2학년때 소풍을 못보냈는데 아들은 부모 몰래 도
시락없이 빈털털이로 옥순봉으로 도망소풍을 갔는지라 어머니는 집안의 남은 돈 다 털어 김밥
사고, 사탕과 건빵을 사서 눈물과 회한의 십리길 걸어 자식찾아 옥순봉 가셨는데 수산생활 팔년
동안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옥순봉 구경이라고 너털 웃음웃으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다섯째 아들 제천중학교 다닐 때 하숙집 찾아 오셨다 떠나실 제, 오리 밖 갔다 되돌아오셔서 백
원 주시며 빵 사먹으라고 하시고 떠나시곤 사리 밖 갔다 다시 되돌아와 백원 더 주시며 배고플
때 짜장면 사먹으라고 떠나신후 삼리 밖 갔다 또다시 돌아오셔선 당신이 마지막 가지고 있던 백
원 마져 주시며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으라고 하시고 떠나신던 그 쓸쓸한 모습을,
충주중학교 교복입은 의젓한 여섯째 아들과 논길따라 과수원 갈 제 찬바람 모질게 불어오자 당
신의 아들이 교복벗어 그바람 막아주는 것 보시고 대견스러워하며 눈시울 붉히시던 그 인자한
모습을,
막내인 일곱째 아들이 충주단월국민학교 다닐 적에 충주까기 걸어와 함께 영화보시고나니 오
후 3시라 아들에게 짜장면 한 그릇 시켜주시고 자신은 배가 아프다며 안 드신후 집으해질녁 집
으로 돌아오셨는데...
어느날 어머님이 말씀하셨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살 돈 밖에 없었다고,
새끼 까마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 성장하고나면 어미 까마귀는 눈
이 머는지라 먹이를 스스로 구할 수 없으매 어른이 된 새끼 까마귀는 늙은 어미 까마귀를 봉양
한 후 어미 까마귀가 죽으면 자신들의 새집으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이제 하등동물인 까마귀의 효의 일생을 상기하면서 우리 일곱 형제는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
를했나 자신들의 생을 반추해보며 통분의 회환과 피눈물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아! 하늘이 부끄러워 자신을 숨기려고 한들 이 지상에 우리 일곱 형제를 숨겨줄 자그마한 움막
이 그 어디에 있으리오.
슬프다! 우매와 미몽에서 깨어나 있을 제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시고 없구나.
피를 토하고 절규하네 우리네 영욕의 인생은 이미 그 막을 내리고 있다고.
이제 일곱 형제는 죄인의 몸으로 어머니가 일생 실천하셨던 그 사랑의 수레바퀴를 따라 남은
생을 다하려하여 우원사모장학회(어머니를 사모하는 뜻을 기리기위해)를 설립하였으며 목숨
이 지상에 붙어있는한 일곱 형제는 이 장학회를 확장발전시키기 위해 맹세코 자신의 남은 삶
을 어머니가 하셨듯이 사랑과 희생, 그 헌신의 제단에 바치려고 하는바 여러분의 밀어주심을
부탁드리며 그 은혜에 결초보은코져 합니다.
우리는 갑니다.
오늘도 가남으로
가시는 길 도란도란 피어있던 연분홍 코스모스로
꽃댕기 땋아 어머니 머리에 메어두고
갈대꽃 사이사이 엮어 목걸이 만들어 걸어두고
은행잎 오손도손 모아 화환을 만들고
플러터너스 낙엽모아 모닥불 만들어
찬서리에 추운 몸 덥혀주려고
우리는 갑니다.
오늘도 가남으로
우리는 갑니다
오늘도 고향땅으로
할미꽃, 철죽꽃 찾아 앞동산 뒷동산 헤메고
냉이 캐고 쑥 캐러 바구니 달랑이고 다니던 곳
고향의 봄 노래부르고
종달새 반주하던 곳
해질 녘 군불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
숭늉 냄새 집집마다 배어있는 고향 땅 어머니 살던 곳
고운 맘 서런 맘 모두모두 등에 이고
우리는 갑니다.
오늘도 고향땅으로
우리 일곱 형제, 안재홍, 재규, 재성, 재완, 재욱, 재흥, 재범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91년 10원 26일
당시 이 이야기는 여성동아 91년 송년호에 감동스토리로 6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었고, 92년
1월 여성지인 QUEEN과 지방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스크랩한 기사와 장학회 발족취지문을 아직도 보관하고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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