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어느 겨울 저녁에 매일 집안 살림을 도맏아 하던 고등학교 1학년인 셋째형이 내게
조리질과 바가지로 쌀을 이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내가 혹시 내일 학교 마치고 친구집에 가서 자고
올지 모르니까 저녁에 어머님이 찾으면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다"고 이야기하라고일러 주면서
미리 이야기는 하지말고 찾으면 그때 이야기하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친구집에 자고 온다던 형은 그 다음날도 들어오지 않았고 집안은 발깍 뒤집혔다.
소위 무단 가출을 한 것이다. 그것도 겨울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2월 중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형은 어디로 간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었고 사실상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우린 형이
그져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여덟 번째로 막내를 낳은후론 연이은 고생으로 신경쇠약을 얻은 어머님은 살아남은 일곱 아들의
살림을 혼자 꾸리시기엔 역부족이셨고 셋째형이 초등학교 4학년때쯤부터 어머님을 도와 집안살림
을 대부분 하던 시절이었다.
형은 가출을 하면서도 본인이 담당하던 살림살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그 업무(?)를 내게 전수하고
떠난 것이었다. 그 것이 내가 밥을 짓고 요리를 하게된 시작이었고 어릴적부터 손에 익어 요리엔
거의 달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당시 충청북도 제천시의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아버님은 매우 강직하시고 자식들에게 아주 엄격하
고 무서운 분이셨는데 아들의 가출후에는 일본식으로 지은 교장관사의 사랑방에 불도 지피지않고
냉방에서 혼자 주무셨었다.
아들이 이 추위에 밖에서 떨고 있을 텐데 애비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느냐고 하시며.....
마음 여리고 정이 유난히 많으셨던 어머니는 아마도 거의 넋을 잃으셨던 것 같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집은 항시 어두운 침묵속에서 그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한 달이 넘고 있었다.
그날 새벽은 유난히도 달이 밝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 새벽에 누군가가 대문을 심하게 두드려 집안 모두가 잠을 깨
었고 열린 대문으로 경찰관과 형이 보였다. 형은 가출해 곧장 열차편으로 부산을 갔고 그 곳 대합
실에 기거하면서 기회가 되면 밀선을 타고 미국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한 지라 대합실에 머물면서 임시로 일 할 곳을 찾았지만 매일 허탕을 치고 저녁
이면 대합실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나가도록 미국행은 불가능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않아 영도
다리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을 여러번 했지만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조금 있던 돈도 다
떨어져 며칠을 굶어 허기져 부산역 대합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부근 난로에 고구마를 한 개
올려놓고 구우며 잡담을 하던 노무자들이 서로 그 고구마를 먹으려고 다투던중 어느 한 사람이
저기 앉아있는 학생이 아무래도 여러날 굶은 것 같으니 주자고 하면서 부르더란다.
그 고구마를 먹는 순간 집이 그리워져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바 학생, 그래도 집만한 곳이 없
으니 돌아가게"하는 소리에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고 한다.
가진 돈이 없어 무임승차를 하고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어
시내를 배외하다가 심야 통금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형이 돌아온 그날 밤 집에는 쌀이 한 톨 없었다.
그 새벽 어머님이 이웃집에서 쌀을 얻어와서 밥을 했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미 그 시절에 세계문학전집시리즈를 거의 다 독파했던 형은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눈보라고개(폭풍의 언덕), 쟝발잔, 보물섬과 같은 소설을 읽게해 내가 문학
에 눈을 뜨게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어린 시절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어떻해든 돈을 구
해 나를 극장으로 보냈다.
그래서 당시에 이만희감독의 만추, 물레방아, 만선등의 예술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라나 타나
주연의 마담X, 제달딘 차프린의 슬픔은 어느별아래등 좋은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형은 재수끝에 서울의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서 해외생활을 여러 해 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외국인 회사의 국내 컨설팅사업을 시작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고 상당한 돈
을 자선사업과 장학사업으로 쓰셨고 어머님의 말년에 극진한 효도를 했다.
또한 10여년전 본인의 어릴적 소원대로 가족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니 그 때의 꿈이 결
국은 이루어졌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서울로 유학간 맏형이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와 촬영한 가족사진 일곱 형제와
부모님이 다 모여 촬영한 유일한 사진이다.
셋째형(오른쪽 위)이 중학교2학년표시 뱃지를 단 것으로 보아 나(오른쪽 아래)
는 초등학교2학년이었고 2년후 겨울방학이 시작할 무렵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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