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우원여사의 숨겨진 이웃사랑 10년 - 여성동아 1991년 12월호 송년특집 기사
Jaewook Ahn
2021. 2. 21. 22:03
밀알은 땅에 떨어져야 꽃을 피운다. 지난 10 여년간 시골 소년소녀가장 국민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지급해온 '평범한 어느 할머니'가 얼마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일곱 아들들이 어머니의 뜻을 잇기로 하고 '사모(思母)장학회'를 설립, 저물어가는 세모를 덥혀주는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
땅으로 돌아가서 '큰이름'을 남긴 한우원(韓又源)여사의 숨겨진 이웃사랑과 희생의 한평생을 돌아본다.
지난 10월 26일 오전 11시경 충북 제천시 교육청 회의실에서는 다소 '이색적인' 장학증서 수여식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장학회 관계자들을 비롯, 정철진 제천시 교육장, 각 학교 교장선생님 그리고 수혜 국민학생등 1백여명.
수여식이 시작되기 전 부터는 여타 장학회 행사와 별 다를게 없었고 오히려 조촐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장학회 관계자가 장문의 장학회 발족 취지문을 읽어내려 가자 분위기는 차츰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머언 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처럼, 왔던 길을 회귀해야하는 인간의 숙명이 어머니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소슬한 가을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지난 9월 16일, 시계바늘이 정오를 향해 다가서고 있을 즈음, 어머니는 곧 다가올 한가위날 일곱자식이 옹기종기 모이는 즐거움, 어머니로서의 그 행복한 꿈과 희망을 대지에 묻고 한(恨)이 골깊히 서린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장학회 관계자는 그동안 참았던 슬픔이 재차 복받쳐 올라오는 듯 취지문을 낭독하면서 몇번이나 잠시 끊었다 다시 읽곤했다.
취지문은 이 장학회의 실제적인 '주인공'인 '어머니'의 갑작스런 별세소식과 한맻힌 어머니의 일생, 남몰래 실천한 이웃사랑, 그리고 세상에 남은 일곱형제의 애끓는 슬픔과 장학회 발족의 배경을 담고 있었다.
장학회 관계자의 오열석인 낭독이 회의장 가득 울려퍼지는 동안 몇몇 참가자들은 시종 어깨를 들먹였고,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머니의 큰뜻을 우리 형제들이 이어 나걸 것'이라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자 국민학생들이 다수인 회의장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날 행사는 '우원(又源) 사모장학회' 발족식 및 결손가정 국민학생 장학증서 수여식. 겉보기로는 지방 중소 도시의 조촐한 장학회 행사로 비쳐졌을지도 모를 이날의 모임이 그토록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평범한 할머니의 이웃사랑'이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우원(韓又源)여사---. 지난 9월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이 69세, 오래전 은퇴한 시골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부인, 7형제를 둔 평범한 한국의 어머니, 이상이 한우원 여사를 '사실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력의 전부다.
그러나 한여사는 지난 10여년간 아들들이 주는 용돈을 '안쓰고 안입는 방법'으로 모아 고향인 제천시. 군의 국민학교 결손가정 아동들에게 매월 3, 4만원씩 남몰래 장학금을 지급해온 '사랑의 전령'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져 저물어가는 세모를 따뜻한 온정으로 덥혀주는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교육정에서 열린 이날 행사도 다름아닌 한우원여사의 평소 뜻을 잇는다는 취지에서 한여사의 일곱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사모(思母)장학회'를 정식으로 발족시킨 것이었다.
더욱이 장학금 수혜자도 제천시.군 관내 국민학교 아동중 보모를 잃었거나, 어머니나 아버지중 한분이 안계시는 결손가정 학생들이어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가난과 희생이 '삶의 전부'
한여사의 이름을 딴 '우원 사모장학회'가 발족된 배경은 간단할지 모르나 평생동안 가난과 희생을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시골 할머니'가 10여년 부터 남몰래 선행을 펼쳐오기까지 뒷이야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우원연사의 고향은 충북 제천군 봉양면. 일제 때 면장을 지낸 한진학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당시 면장이라면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부친 한진학씨는 이웃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다. 6.25가 터져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면장을 지낸 한씨는 당연히 '처단의 대상'이 되었으나 동네사람들이 모두 말려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우원 여사가 '나눔의 미덕'을 일찍이 체득한 것도 이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풍국민학교를 졸업한 한여사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19세에 빈한한 집안의 국민학교 교사 안영길(安榮洁.71)과 결혼했다. 해방직후 국민학교 교사의 월급은 쌀 두가마니 정도. 한여사의 평생에 걸친 가난과의 싸움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게다가 두세살 터울의 아들을 일곱이나 낳아 '아들부자' 소리를 들었으나 가난은 그와 반비례하여 더욱 가중됐다.
당장 자식들의 수업료가 문제였다. 첫아들 재홍씨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하자 잇달아 들어가는 수업료를 감당못해 한여사는 쌀 두가마니중 한가마니를 아들들의 '수업료 용'으로 비축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커가면서 아홉식구가 쌀한가마니로 한달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첫아들 안재홍씨(48. 현대자동차서비스 부장)는 "중고교시절 끼니를 자주 걸렀는데, 어쩌다 하루 두기 먹으면 많이 먹는 날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또 식사시간 때 '밥푸는 담당'을 맡았던 셋째 재성씨(44, 주식회사 구산상사 대표)는 "밥을 질게하면 그릇에 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머니는 절대로 밥을 질게 하지 않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이 아홉식구의 뼈속까지 파고들수록 한여사의 강인함도 더욱 살아나 나머지 식구의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고 한다.
한여사의 강인한 체질은 타고난 것으로, 넷째 재완씨(43. 구산토건 대표이사)를 낳고 2주일간 밀기울만 먹고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이무렵부터 한여사는 가난과 희생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옷'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안먹고 안입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한번은 어머님이 입고 계시던 저고리가 당신의 표현처럼 '천겹만겹 기운 옷'이어서 포목점에 가서 저고리를 한 감 떠오셨지요. 그때 제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저의 옷도 다 헤진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시더니 '이 몸이 미쳤지'하시며 저를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우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포목점에 가서 옷감을 물리셨지요."
셋째 아들 재성씨의 회고다. 물론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부모는 드물겠지만 한여사의 자식사랑은 눈물겨운데가 있다.
"3년쯤 전이었어요. 우리 형제가 모두 장성한 뒤의 일인데, 제가 사소한 일로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어요. 저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지자 가만히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다투다 말고 갑자기 서랍에서 약을 꺼내 저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거예요, 약을 보니 우황청심환이었어요. 제가 격앙되 있으니까 '혹시 어찌될까봐' 주신거지요."
느닷없이 우황청심환을 받아든 첫째 아들 재홍씨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의 자제들이었으나 중학교부터 늘상 수업료가 밀렸다고 하는 이들 형제들은, 그러나 7명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이들 7형제들이 가난속에서도 대학을 모두 마친데는 남다른 '슬기'가 있었다.
먼저 큰형이 대학을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바로 밑의 동생 대학입학금을 마련해준다. 둘째 아들이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아래 동생 학자금을 지원해 준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계속 유지하면서 이들 7형제들은 성균관대, 서울대, 서강대, 고려대 등 서울의 유수한 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이들 형제들의 끈끈한 애정은 둘재 재규씨(46. 외환은행 지점장)의 셋째 재성씨를 위한 '도시락 싸주기 작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울대 상대에 재학중이던 재규시는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 학자금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재규씨는 그러면서 등교하기전 입주한 집에서 아침밥을 실컷 먹은뒤 갖고온 자기 점심 도시락은 재성씨에게 줘 버리는 것이다.
(주: 사실은 재규형은 고등학교 때 제천 모여고 교장의 아들인 친구집에 입주해 친구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음.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단시 숙식만 해결해주는 조건이었는데,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동생을 생각하면 친구집에서 준비해준 도시락을 자신이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학교 등교길에 어머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락을 집에 두고가곤 했는데,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이러한 형제애는 지금도 계속돼 스웨덴 움살라 대학을 거쳐 현재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박사과장을 밟고있는 여섯째 재흥씨(36)의 유학자금을 형제들이 모아서 지원해 주고 있다. (주: 동생 재흥은 멏년후 귀국해 아주대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금년 정년퇴임예정임)
그러나 이들 형제들은 어머니가 자식들 몰래 재흥씨 유학 자금을 돕기 위해 3년짜리 적금도 붓고 있었다는 사실도 한여사가 돌아가신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한여사가 보관하고 있던 너덜너덜 헤진 적금 통장 내역을 보니 돌아가시던 달(9월)이 적금 만기일 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마지막 적금을 붓고 돌아가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