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

Arpeggione Sonata in A Minor (Schubert)

Jaewook Ahn 2017. 12. 31. 18:11

Arpeggione Sonata in A minor D.821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Daniil Shafran, Cello / F.Gottlieb, Piano


 

 아르페지오네는 기타 첼로라고도 불리우는  것으로 1823년에  빈의 스타우퍼가 발명하였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이름만이 남아 있으며 슈베르트만이 이 악기를 위해서 작곡하였다. 모
양은 기타와 같고 바흐 시절에 많이 연주했던 비올라 다감바와 흡사하기도 하다.
1824년 여름 슈베르트는 에스텔하찌 일가와 함께 체레스라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슈베르트는 백작 딸과의 사랑이 싹트고 체레스의 헝가리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기에 이 작품에서는 헝가리풍의 요소를 크게 반영시켰다. 그 헝가리풍의
디베르멘토(회유곡)의 하나가 <아르페지오네와 피아노 소나타a단조>이다.
이는 새로운 악기에의 흥미를 말해주고 있거니와 슬라브풍이나 마잘풍의 분방한 성격이 아름답

게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 대신 첼로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
적인 것이 되어 있으며 비올라로도 연주 되고 있다. 

 

 


 

 

 


 첼리스트 샤프란은 1923년 1월 13일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후에 Leningrad로 개명됐다가
다시 옛이름 St.Petersburg로 돌아간다)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
트라의 첼로 수석이었던 아버지 보리스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여, 2년 뒤부터는 어린이를
위한 특수 음악학교에서 알렉산더 쉬트리머(Alexander Shtrimer, 1888 - 1961)에게 사사했다.
이듬해,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입학이 허가되고 그 해에 음악원에서 "물레젓는 노래"등 2곡을 연
주했다. 샤프란이 대중들 앞에서 한 첫연주였다. 이어서 1933년(10세)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의"로코코 변주곡"을 연주했다.
14세 때(1937년) 전(全)소련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콩쿠르 요강에 따르면 샤프란의 나이가 응모

자격이 없었지만 콩쿠르 운영위원회가 특별히 응모를 허가했던 결과였다. 이때 부상으로 받은
1630년도에 제작된 아마티를 받아 그 이후 평생 사용한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1943년에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로이스트로 임명

되고, 그때부터 샤프란의 본격적인 연주경력이 쌓이기 시작한다. 1946년엔 에네스쿠와 루마니
에 가서 연주회를 갖고 바흐,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부다페스트의 "평화우호
축제 콩쿠르"(1949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1950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 우승했
고, 그 후 런던에 데뷔하고, 1960년에는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을 가져 미국에도 이름을 알리
시작했고, 1971년에는 소련에서 수여하는 인민 예술가 상을 받았다. 1974년 6월, 연주가로
는 대단한 명예였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의 첼로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샤프란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혁명
이념인 문제로 소련을 떠나 서방에서 활동한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달리 74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 등 동구권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만큼 서방세계에는 알려지
지 않았던 것이다.  세련미가 대단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서정성과 아름다움이 그의 연
주에서 껴진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고 외형적으로 화려한 연주를 했던
반면, 샤프란은 소박하고 따스하고 내면적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연주를 들려주었다. 따뜻한 음
향을 좋아한 과거 LP 수집가들에게 샤프란의 음반이 중요한 수집 목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이었다. 외향적이고 박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샤프란은 비
교적 악보에서 자유로운,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연주를 들려준다는 평가를 들었다.

 샤프란은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진지한 연주자의 길을 걸은 철학적인 연주자로 알려져 있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새삼스레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많은 매니아들이 생겨나고
있고, 지어는 첼로의 황제인 카잘스에게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첼리스트라는 과격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다닐 샤프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첼리스트 가운데
사람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관계로 여전히 사실보다는 훨씬 과대포장된 상태로
신비의 첼리스트로 남아 있다. 언젠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만약 당신이 로스트로포비치
의 연주에 감동을 받았다면 샤란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하면서 진가가 제대
로 알려지지 않은 미지첼리스트러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기도 했었다.

 샤프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참고해야 할 음반은 바흐의 6곡의 무반주 첼로 모

다. 것은 이 작품이 첼리스트의 정신과 기교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이유도 있겠
고, 모든 연주가들이 혈을 기울여 도전하는 곡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역시 샤프란의 깊은
내면 세계가 이상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닐 샤프란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연주에 본격적으로 어프로치하게 된 것은 1950년

후반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지났을 때의 일이다. 연주가로서의 경험이나 정신적 깊이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서 이 심오한 음악에 자신만의 특별한 영혼을 불어넣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1997년 74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연주자로서의 그의 삶에 있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지고의 예술적 이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샤프란은 끊임없이 청
들 앞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며 서서히 이 작품해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
젊은 시절의 열정과 경외감에 삶의 무게를 실어 깊고 웅혼한, 그야말로 장엄하고도 아름다
운 세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샤프란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의 40대인 1969-1974년 사
소련의 국영 레이블인 멜로디아에서 녹음 발매했던 전곡녹음으로 LP시대에는 전설적
명반으여겨졌던 유명한 연주이다.

 샤프란은 대단히 열정적인 성격이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심한 낯가림을 할만큼 부끄러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슨도 꼭 자기 집이나 제자의 집에서 했다. 학교
에서 레슨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무대에서 연주할 때, 그가 사용하는 의자는 아주 높았
고, 항상 의자의 맨끝 부분에 걸터앉듯이 앉아 연주했다고 한다.
1997년 2월 7일 러시아에서 74세라는 생애를 마감했다.